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동로마 제국]] 동맹과 [[이집트]] 원정 ==== 어쨌든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등의 종교 기사단이 맹위를 떨치고 이집트의 [[국가 막장 테크]]를 탄 파티마 왕조와 페르시아 쪽에서 콩가루가 된 [[셀주크 제국]], 이슬람권이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호의적이던 다마스쿠스 등 각종 이슬람권의 버프를 받아 그런대로 영토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보두앵 3세가 아스칼론을 점령하니 십자군이 네게브를 아우르고 레반트 서부 해안을 완전히 장악하여 십자군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에는 대가가 따랐다. 앞선 2차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뻘 짓으로 왕국과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다마스쿠스의 힘이 약해지고, 왕국이 아스칼론을 점령하자 예루살렘 왕국과 파티마의 충돌로 힘의 균형이 기울어졌다. 힘의 공백이 생기자 그에 따라 아래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두앵 3세는 내전과 파티마와의 전쟁으로 인한 군사력 소모로 다마스쿠스의 방어를 지원할 병력이 여의치 않았다. [[제2차 십자군 원정]] 후 비록 십자군이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와 화해를 하였다지만, 그들은 더 이상 기독교 종자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종교를 위시한 누레딘의 설득에 마음이 동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아스칼론이 함락된지 몇 달 되지 않아 다마스쿠스 민중들은 대중에게 인기를 상실한 지도자를 축출하고 누르 앗 딘이 당도하자 성문을 올려주었다. 말 그대로 무혈입성, 누르 앗 딘은 명실상부한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듯 이슬람 도시였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우호적이었던 다마스쿠스가 장기의 후계자 누르 앗 딘의 손에 떨어지면서 오히려 상황만 악화되었다[* 이건 전적으로 2차 십자군의 자업자득인데, 이때 일로 단단히 감정 상한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다마스쿠스는 중립 도시라고 하며 예루살렘 왕국에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않은 성주에게 단단히 빡쳐서 성주를 죽이고 그대로 누르 앗 딘에게 항복했다. '한스 에버하드 메이어'라는 현대 역사가는 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공격을 두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머저리 같은 결정(incredibly stupid decision to attack Damascus'이라고 일축했다.] 아스칼론 점령의 대가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십자군이 실질적으로 이집트 시나이 반도 부근까지 영토를 넓히자 예루살렘의 시야에 [[나일 강]] [[삼각주]] 유역인,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 펼쳐져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레반트]] 지역은 척박하고 황량한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절까지 장장 일천 년 동안 그들의 곡식 창고였던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 땅을 넘볼 수 있게 되자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마치 그들의 입에서 [[빙의]] 당한 듯 마냥 '''DEUS LO VULT'''가 또 다시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신께서 원하시고(?) 선대 왕들의 염원이 눈 앞에 아른거리자 자국의 영토를 공고히 해야 할 시점에 무리를 하게 된다. 결국 훗날 유럽으로부터 많은 십자군을 끌어들여 처참한 결과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두앵 3세는 동로마 제국을 동맹자로 하여 [[우트르메르]]의 상황을 진정시켜보려 하였다. 비록 과거에 비해 영광이 바래 졌다지만 [[조지아]] 왕국의 전성기에 [[셀주크 제국]]이 주춤하자 동로마 군대는 어부지리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근차근 재 점령하고 있었으며 이 시점에서 제국은 예루살렘과 시리아의 흔들리던 세력 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면 동로마 제국 해군 전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제국과 왕국의 관계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가지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시간을 돌려 보두앵 2세 시절 이탈리아에서 막 귀국한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2세가 이슬람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어린 딸 콩스탕스[* 보두앵 2세의 딸 알리스의 딸이라 보두앵 3세와는 사촌지간]가 성장하여 레몽 드 푸아티에와 결혼하여 잘 통치하는 와중에 또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이 [[1149년]] 이슬람의 누르 앗 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그의 미망인 콩스탕스가 이번에는 본인의 희망대로 바락바락 우겨서 재혼한 상대는 잘생기고 용감무쌍한 모험가이자 나쁜 남자,--놈팽이-- [[르노 드 샤티용]]이었다. 그는 [[1156년]] 동로마 제국에 감히 공물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小아르메니아 왕국의 토로스와 합동으로 아나톨리아를 휘젓다가 키프로스로 건너가 무려 3주간 종횡무진하며 약탈을 일삼는다. 기독교의 영토라는 사실은 엿 바꿔 먹어버리고 섬 전역에서 공국의 십자군이 [[흑화]]하여 [[살인]]과 [[관광]], [[파괴]]를 일삼았다. [[마누일 1세]]은 물론 보두앵 3세마저도 이에 격노하여, '''어렵게 보이던 동맹이 이렇게 결성되어버리는, 인류 역사상 다시없을 황당한 이유로 동맹 성립이 이루어진다.''' 황제는 이미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진격 중이었고, 보두앵 3세는 마누일 1세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정벌하는 동안 관여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황제는 누르 앗 딘에 대한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을 약속했다. 보두앵 3세는 험프리 드 토론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어 마누일 1세의 조카딸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동맹에 방점을 찍었다. 안티오키아의 공작 르노는 약탈 당시에도 주변의 지지를 못 받고 독단적으로 설쳤기에 휘하의 기사들도 도와주지 않았다. 상황을 그때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제국의 진군에 대항하려 진지를 성심 성의껏 구축하고 [[관광]] 전우인 소 아르메니아의 토로스를 돌아봤더니 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홀로 동로마의 격노를 쓸쓸히 맞이하게 되었다. 르노는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힘없는 이들을 죽이는 재주는 뛰어났지만 강자에게는 한없이 순해지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예루살렘 성 십자가의 기적 같은 도움 없이는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그제서야 르노는 황제의 진영으로 거친 베옷을 입고 구르듯 들어가 그의 발치에 오체투지하며 거의 울면서 자비를 구걸했다. 그냥 죽였으면 그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편했을 텐데 정말 과분하게도 안티오키아 공국을 동로마 제국에 예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제국의 봉신으로서 안티오키아를 통치하도록 허락해주고 만다. [[1159년]] [[4월 12일]], 마누일 1세는 삼아 안티오키아 진입으로[* 르노 드 샤티용은 마누일 1세의 말 고삐 잡이로 말도 못 타고 걸어서 들어가는 개굴욕을 당한다.] 수 세기만에 동로마 황제가 다시금 입성하게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조카 사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르 앗 딘의 본거지인 [[알레포]]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이번 이야말로 알레포가 함락될 것 같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마누일 1세의 욕심은 안티오키아까지였던 듯하다. 본심은 알레포보다 [[십자군 국가]]들에게 평화를 되찾아주는 일에 힘썼다. 알레포를 포위했지만 곧 포위를 푸는 조건으로, 누르 앗 딘에게 현재의 국경대로 예루살렘 왕국과 휴전 협정을 하고 누르 앗 딘에게 동로마의 [[셀주크 제국]]에 대항한 [[아나톨리아]] 탈환에 지원을 한다는 것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주변 이슬람 세력들은 숙적 동로마의 군대와 충돌할 것을 두려워하여 침공을 멈췄고, 동로마 제국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종주권을 확고히 함으로써 쌍방 이득을 얻었다. 일부 십자군 기사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모든 전선에서 휴전 협정이 성립되었다. [[1160년]] 르노는 안티오키아 정치에서 배제당해 주변 이슬람 상인들을 약탈하는 것으로 소일하며 누르 앗 딘에게 개기다가 유프라테스 계곡 근처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와중에 누르 앗 딘에게 빡공을 맞고 --예루살렘 왕국의 입장에서 끔찍하게도-- 산 채로 사로잡혔다. 그러나 공작이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몸값을 내주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 후로 16년간이나 알레포에서 포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남편인데 몸값조차 지불하지 않았던 걸 보면 [[콩스탕스]]도 그때 즈음엔 그의 패악질에 콩깍지가 싹 벗겨졌던 듯하다. 르노가 본토 프랑스의 샤티용에서 계승권에 밀려 2차 십자군에 흘러 들어와 영토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무식하지만 열심히ㄷㄷ-- 활동하다 이슬람에 포로로 잡혀 고초를 겪어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다는 것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사실 이렇게 광역으로 설쳐댔는데도 안 죽고 여공작의 남편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해 [[기 드 뤼지냥]]과 붙어먹은 것도 용하다. ||<:>[[파일:1123e15e06ba68829360ff39cf4ebd7d--byzantine-empire.jpg|width=100%]]|| || 승리자로써 입성하는 로마 황제 [[마누일 1세]]와, 그 말을 끄는 [[르노 드 샤티용]][* 르노의 상태가 상당히 미화 되어있다. 사실은 베옷을 입고 산발에 맨발이었다.] || 마누일 1세는 셀주크 제국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2세와 싸웠고 3년 후에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나중에 황후 술츠바흐의 베르타가 죽자 마누일 1세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에게 새로운 신부감 물색을 부탁했다. 마누일 1세와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만나 [[소개팅]] 주선 겸 대 마상시합을 할 만큼 친해졌으나, 이때 르노 샤티용이 누르 앗 딘에게 포로로 잡혔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을 때 공국의 섭정위를 보두앵 3세가 콩스탕스의 장남 보에몽 3세[* 1149년 콩스탕스의 첫 번째 남편 레몽 드 푸아티에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에게 독단으로 맡기자, 예루살렘이 황제에게 권했던 국혼을 마누일이 씹고 콩스탕스의 딸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둘의 동맹은 흐지부지되었다. [[1161년]]에 모후 [[멜리장드]]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기억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더이상 그녀가 맡았던 국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자매들인 트리폴리 백작 부인 오디에르나와 베다니 수녀원장인 이오베타가 간호를 맡는다. 하지만 결국 그해 [[9월 11일]] 모후 멜리장드는 사망한다.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올리브 산 근처의 성모 마리아(Church of Saint Mary)의 교회에 매장되었는데 바로 어머니 모르피아 옆이었다.[* 선왕 보두앵 2세의 아내이자 예루살렘의 여왕 모르피아는 성묘 교회에 안치되었던 남편과 떨어져 성모 마리아의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그것이 이후 여성 왕족들은 성모 마리아의 교회에 안식하게 되는 선례의 시작이었다.] 멜리장드는 말년에 동로마 패퇴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성자 사바스(Saint Sabbas)의 정교회 수도원을 복구하여 예루살렘 동쪽 외곽 올리브 산 근처의 성모 마리아 교회와 겟세마네 교회(Gethsemane Church), 그로토 아고니 (Grotto of the Agony)[*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의 암굴에서 고뇌하는 기도를 밤새 행했다는 성지]를 관리하게 하였고 그 수도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기욤 드 티레]]는 멜리장드의 30년 통치에 대해 "그녀는 매우 현명한 여성이었고 거의 모든 업무에 경험이 풍부했으며 그녀는 중요한 업무를 성별이라는 장애를 완전히 극복하여 담당했었다 (중략) 그리고 선왕들의 영광을 모방하려고 애썼던 멜리장드는 그 점에서 그녀의 전임자와 동일하다고 간주된 능력으로 왕국을 통치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중세 시절 여성에겐 그들의 남자 형제, 아버지, 심지어 아들보다도 더 적은 권리와 권한만을 제한적으로 주려 애쓰던 사회와 문화로부터 최상의 존경과 찬사를 보낸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야 진정한 왕이 되었지만 [[보두앵 3세]]는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질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1162년]] [[2월 10일]] 모후 멜리장드를 뒤따라가듯 짧은 병상 생활 후에 동생 아모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뒀다. [[성묘교회]]에 안치되어 관 뚜껑도 닫기 전에 이 시절 젊은 왕의 죽음에는 늘 그렇듯 독살의 의혹이 일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두앵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나자 곧바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보두앵 3세가 승하하였을 때 왕비 테오도라 콤니니는 아직 16세였고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대의회 오트 쿠르의 승인 아래 왕의 유언대로 동생 아모리가 뒤를 이었다. *''' 아모리 1세 ''' 아모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형과 비슷했으며, 동생이 훨씬 체격이 컸음을 제외하면 생김새도 닮았었다. 하지만 일부 귀족들은 아모리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1157년]] 그는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와 결혼했으나,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이 너무 근친[* 7촌 사이. 아녜스가 손위 뻘이다.]이라는 이유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예루살렘 왕국)|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아모리 드 네슬레의 비난을 받았다. 아모리는 결국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보두앵 4세|보두앵]]과 [[시빌라|시발라(예루살렘 왕국)]]가 적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했고, 아녜스 드 쿠르트네는 바리장 디블랭과 헬비스 드 람라의 장남 위그 디블랭[* [[발리앙 디블랭]]의 큰형]과 재혼했다. [[1162년]] [[2월 18일]]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아모리의 대관식을 열고 [[기름 부음]] 의식이 치러졌으며 [[아모리 1세]]로 등극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모리 1세는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접한 야파와 아스칼론의 공작이었으므로, 왕국의 장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속에 이집트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4번째 이집트 원정은 예정된 서막이었다. 이집트 원정은 사실 시기적으로 적합한 시점이긴 했다. 파티마 왕조가 와해되어 두 명의 와지르(Vizier)가 파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 파티마의 숙적인 누르 앗 딘이 이곳의 중요성을 내다보고 파견한 장수 [[시르쿠]]의 연합으로 한 쪽 파벌의 와지르 샤와르(Shawar)가 권좌에 앉았다. 그러나 종래에는 시르쿠와 샤와르의 관계과 악화되면서 또 다시 파국에 접어들자 샤와르는 아모리 1세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된다. [[1164년]] 예루살렘 왕은 파티마 왕조에서 벌어진 대혼란에 개입하여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빌베이스]](Bilbeis)에서 시르쿠를 포위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누르 앗 딘은 [[동네북]]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지휘관들을 사로잡았다. 할 수 없이 아모리 1세는 시르쿠가 이집트에서 물러나면 본인도 물러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써 당분간은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으나 파티마 왕조의 지속적인 불안정한 상태는 삼국에게 살얼음판 같은 눈치 싸움으로 양상이 변해가고 있었다. [[1167년]] 때가 무르익자 누르 앗 딘은 기독교 손에 떨어질 듯한 이집트를 선점하기 위해 또 다시 시르쿠를 파견한다. 이때 시르쿠의 조카 [[살라흐 앗 딘]]이 함께 종군한다. 파티마의 샤와르는 이번에도 아모리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왕국은 위그 드 카이사레아를 [[카이로]]에 보내 원조 조건으로 40만 디나르를 지불하는데 동의하였으나, 위그는 대담하게도 [[칼리파]]가 직접 조약에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조약이 체결되자 아모리 1세는 시르쿠가 점령중인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 진군하여 포위 공격으로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지금껏 고대의 [[총대주교]] [[교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세력권 밖에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스|성 마르코]]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개선식을 하듯 입성하여 저 유명한 [[파로스의 등대]][* 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이 시절에는 건재했었다.]에 십자가를 걸고 성수를 뿌리는 등 정화 작업을 했다. 기독교의 주요 5대 교구를 모두 이슬람의 손아귀에서 회복하고 이집트를 예루살렘 왕국의 휘하에 두는 기염을 발휘하기에 이르니 십자군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비옥한 삼각주를 공격해 공물을 받아내기도 했다. 추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누르 앗 딘의 공격에 대비해서 수도인 카이로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그 대가로 연간 금화 십만 디나르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이렇듯 아모리 1세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 왕국을 정점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니 이집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왕은 누르 앗 딘이나 시르쿠 마냥 이집트를 아예 예루살렘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려는 과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후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는 상황 반전을 위해 [[기욤 드 티레]]를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보내 파티마 왕조에 대한 협동 공격을 협의하게 했다. 그리고 다시금 마누일 1세의 조카 손녀인 마리아 콤니니와 재혼하고, 동로마와 결혼으로 든든한 우방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구호기사단]]이 강경하게 이집트가 무력하니 단숨에 점령할 수 있다고 단독 공격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샤와르는 못 믿을 종자며 그의 아들 카밀은 누르 앗 딘과 내통하고 있는 간교한 자라고 진언했다. 따지고 보면 십자군의 당시 힘은 그런 임무 달성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물이 올라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동로마의 도움을 받으면 오히려 그들이 전성기 역사를 내비치면서 이집트를 독차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성전 기사단]]은 오히려 반대였다. [[다마스쿠스]] 때처럼 우방을 공격해서 도리어 적들이 어부지리를 얻는 형세가 되는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기점에서 아모리 1세는 과거 자신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명제를 선택해버리고 콘스탄티노플의 합공 여부의 전갈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집트 공격을 이끌었다. 성전 기사단은 이 공세에 불참을 통보했다. 이집트의 샤와르는 누르 앗 딘의 탐욕적인 손아귀에 질려 아모리 1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상태였는데 돌연 아모리 1세에게 따귀를 맞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줏대 없는 샤와르는 누르 앗 딘에게 바로 달려갔다(...) 막대한 사례금과 이집트의 3할을 약속받은 누르 앗 딘은 또 다시 시르쿠를 파견했다. [[1168년]] 11월, 십자군은 빌베이스를 장악하고 곧장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이 나일강에 배를 띄워 강을 거슬러 천천히 올라가느라 지체하는 사이에 시르쿠의 군대가 카이로 근방까지 다다랐다. 이미 십자군은 누르 앗 딘이 다된 밥에 재를 뿌리자 의욕을 상실했다. 그 사실을 아는 시르쿠 역시 십자군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아모리 1세는 철수하는 대가로 샤와르에게 돈을 받아내려 했으나, 십자군의 공세가 무력화되었음을 알았기에 협상에 임하는 척 시간만 끌었다. 결국 십자군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이집트에서 쓰디 쓴 퇴각을 한다. 아모리 1세는 이집트를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본래의 전략으로 [[마누일 1세]]의 150척의 동로마 해군을 지원군 삼아 다미에타를 공격하기로 하여, [[1169년]] 육, 해상 양쪽에서 진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승산을 저해하는 것은 누리 앗 딘도 아니고 시르쿠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십자군은 황제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전리품을 독차지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그를 조금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의 협력이 부족하니 이 계획은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뇌부의 분란과 달리 병사들은 동로마의 도움을 알고 있었기에 기세가 등등하여 이집트에 대한 십자군의 육상 공격이 임박하지만 때마침 우기가 시작되자 시르쿠가 십자군을 격파하는 통에 다 날아갔다.(...) 비가 그칠 기미가 안보이고 전장이 늪으로 변하자 아모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동로마 제국 함대 역시 귀국했으나, 우기의 폭풍우를 떨쳐내지 못하고 다수의 선박을 잃었다. 이 원정의 실패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십자군 귀족들은 대외적으로 동로마를 비난했으나, 실상은 왕의 늑장과 전술을 탓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아모리 1세는 그래도 이집트를 정복한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연합 공격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는 다미에타에서 생긴 악감정에도 불구하고 마누일 1세와 우호적인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동로마 제국의 정적 노르만인들과 협상을 개시했는데 여기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174년]] 그 놈의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 1세는 즉각 시리아의 바니야스를 공략했다. 이집트 전선에 적들의 군대가 모이는 것을 막기위한 성동격서였다. 그리고 당시 전성기를 이룩했지만 점점 위상이 하락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굴리엘모 2세가 아모리 1세의 협조 요청에 대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여 국가의 위상에 반전을 꾀했다. 아모리 1세는 그곳에서 노르만군과 합류해서 포위 공격을 도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예루살렘 왕들의 고질병인 이질에 걸리고 말았다. 왕은 고열에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시칠리아 왕은 단독으로 공격을 준비했으나 급습을 받는 바람에 배로 도망쳐 돌아갔고 바로 본국으로 돌아간다. 예루살렘에서는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해 [[7월 11일]] 아모리 1세가 병사한다. 결국 이집트 원정도 실패하여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패권을 쥐게 되어 훗날 아이유브 왕조가 들어서게 되고, 당시 이집트 원정을 주도하던 아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살라흐 앗 딘에게 관광당할 처지에 놓였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니니는 [[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이사벨]]을 낳고 모후 [[멜리장드]] 사후 왕국령이었던 나블루스를 유산으로 받았다. 첫 번째 부인 아녜스가 낳은 아들 [[보두앵 4세|보두앵]]이 [[문둥병|사망 플래그]]를 가지고 아모리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